(2024.10.13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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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 18개월 동안 우리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가슴 아픈 사실을 깨닫는다. 내 바깥에는 내가 없어도 여전히 존재할 사람들과 사물들이 있다.
내가 울어도 우유가 생기지 않고 내가 웃어도 어머니가 오지 않으며 나의 필요가 저절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점차 깨닫는 일은 적잖이 고통스러운 경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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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성인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간은 생후 18개월에서 만 3세 사이에 첫 옹알이를 하며,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언어가 된다. 비록 주변에 내게 속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 좌절을 느끼지만 이제 말을 통해 복수할 수 있다. 처음 배우는 말이 우리에게 사물에 대한 신기한 힘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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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를 변경하려는, 즉 새로운 통찰을 통합하여 현재의 입장을 수정하려는 끊임없는 의지야말로 성숙한 종교가 갖는 필수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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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게는 약점이 많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며, 흉한 생각이 많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흉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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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알곡을 거두려면 가라지도 함께 두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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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것에 확신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다. (고든 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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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란 정체된 물에 떠다니는 무수한 쓰레기 조각처럼 수없이 다양한 말과 개념과 생각과 행동이 난무하되 서로 연결되지 않은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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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픈 곳이나 숨은 약점을 이용해 상대를 탈취할 수 있다. 멀리서 보고 있다가 언제든 내 마음 내키는 데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렇듯 탈취의 형태는 곧 권력의 형태이다. 그것은 약탈 구조로 되어 있다. 상대의 약점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상대가 내 길을 막을 때 공격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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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대의 인생 이력을 들춰내고 과거를 조사하여, 앞으로 그가 나의 권력에 도전할 때 무기로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을 찾아낸다. 탈취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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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바로 약자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첫 번째 특징이다. 진정으로 의존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가장 실존적인 체험으로 상대를 초대하는 일이며,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차원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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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산책은 짧게 끝났다. 그러나 나중에 이 일을 두고 웃으며 이렇게 말할 날이 있으리라.
"적어도 우린 두려움 없이 속마음을 보일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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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의 최고 안전장치는 그 아이에게 쏟는 관심이 아니라 부모가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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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었음을 표현하는 말로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에게 새로운 도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 조건의 한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약자의 교제를 가르쳐 주는 도덕이어야 한다. 이제 사랑은 다가오는 재난이 두려워 서로에게 매달리는 행위가 아니라 새 생명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자유로운 만남이 된다. 이 사랑은 증명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초청되어 적극적 반응을 통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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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뒤에는 어떤 엄밀한 분석 체계로도 파헤칠 수 없는 극히 개인적이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엇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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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상충하는 많은 자극에 파묻혀 서로 모순되는 입장과 이상과 욕망에 부딪혀 살아가며, 자기가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사건과 감정에 휩쓸려 길 잃은 느낌을 많이 받는다.
"오늘은 비폭력을 말하다가 내일은 혁명을 말하고, 오늘은 유럽의 십자군을 말하다가 내일은 베트남 학살을 말하는 이 미친 세상에서 나는 과연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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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좌절은, 멈추어 제 '짐'을 주님께 맡기라는 소리 없는 주님의 음성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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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문제가 풀린 것인가, 묻힌 것인가? 진정한 내면의 갈등이 해결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체험의 막강한 위력에 잠시 가려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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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나 부흥회 도중 내면 깊은 신앙 체험을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백할 만한 사실이 있다. 당장은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지만 진짜 시험은 나중에, 말하자면 의지할 감정과 기댈 체험이 전혀 없을 때 찾아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고 벌거벗은 믿음만이 우리 전부인 광야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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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준비의 종교성을 강조하는 종교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랜 세월 그 백성을 준비시킨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강림절과 사순절을 지낸 후에야 각각 성탄절과 부활절을 맞이한다. 사도 바울은 아직도 영적 젖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과 단단한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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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훈련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숱한 의문과 회의와 실패에 치이고 치여, 결국 "가장 불확실하고 막연한 직업에 가장 확실한 불변의 헌신을 해야만 하는가"하는 의혹의 골만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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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과 야망과 사랑이 넘치는 젊은이에게는 남들의 인정도, 도전도, 확실성도 없는 삶에 헌신하는 것은 아예 헌신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정체감 위기가 괴로운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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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여전히 인간이 평생 직업을 선택하는 주요 과정이다.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젊은이의 인생 선택에 가장 강한 설득력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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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구두시험에 통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교수가 더 이상 묻지 못하도록 쉬지 않고 말하거나, 반대로 교수에게 계속 말을 시켜 답을 유도하여 최대한 무지를 감추는 것이다. 많은 대화에서 말은 두려운 침묵을 메우거나 진짜 중요한 질문을 막거나 아픈 부분을 피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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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문제는 신학생들이 더 이상 서로 피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소그룹들의 자생 터전이 되는 큰 집단에서는 못마땅한 사람들을 피하고 생각이 다른 이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모임에도 비교적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반면 팀에서는 소수의 동료와 아주 가까울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많은 행동은 팀원들의 비판의 눈을 벗어날 수 없으며 거꾸로 팀원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팀 모임에 가지 않으면 금방 눈에 띌 뿐 아니라 그룹에 대한 흥미나 헌신 부족이라는 질책을 받게 된다. 모임 중에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침묵하는 이유를 알려고 한다. 내가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모든 일에 개인적으로 깊은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그러므로 팀 생활은 분명 대단위 집단생활보다 요구하는 것이 훨씬 많다. 훨씬 높은 성숙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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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학생들을 양성하는 상황에서는 팀이 과제 지향적으로 되지 못할 때가 많다. 흔히 학생들이 기대하는 팀은 팀원들에게 최선의 생활 조건을 제공하는 곳이다. 마치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돌아가는 가정과 비슷하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팀이 과제 지향적이 아니라 자아 지향적으로 되기 십상이므로, 이제 팀의 문제는 수행해야 할 일의 본질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인 관계의 본질 때문에 생겨난다. 이때 팀 모임은 다분히 아마추어 그룹 치료로 전락하기 쉽다. 팀원들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탐색하려 하며, 혼자 간직하는 것이 훨씬 좋을 많은 문제까지도 털어놓으라고 부추긴다.
그렇게 되면 팀 모임에는 긴장이 팽배할 수 있다. 개인 문제를 벗어나 공통 관심사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자아 중심으로 치닫다가 자아도취의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나이, 학교생활, 미래의 직업에 관한 양면 감정 등을 고려할 때, 이 학생들은 이미 자의식이 강하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때에 따라 개인의 불안과 혼란을 표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신학교 교육 전체의 주요 목표는 학생들을 자신에 관한 관심에서 벗어나 동료 인간들의 삶과 문제에 진정 관심을 두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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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팀을 원초적 필요와 욕심에 따라 움직이는 일개 파벌로 전락시키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많은 학생이 스트레스가 무척 심해 친밀함의 집요한 욕구에 이끌려 친구들에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 비현실적인 환상만 자극할 뿐이다.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어디선가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내 모든 좌절감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환상말이다. 신학생 시절에나 사역의 길에 들어설 때나 이런 환상을 품고 있는 사람은 아주 불행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팀이 이런 비현실적인 친밀함의 욕구를 채워 주는 방편이 된다면 오히려 큰 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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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위 신경성 피로는 전체적으로 과민한 생활 방식의 산물이다. 인간의 자동 과정을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매순간 자기 행동을 이해하려 하는 상태인 것이다. 자기 호흡을 애써 느껴야 한다면 이미 위험한 상태이며, 자기 심장 박동을 통제하려는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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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실험에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예상한 문제라면 처음부터 진정한 실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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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기중심적 공동체는 학생들을 다시 자신에게 몰입하게 하여 내성에 빠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소명이란 끝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 내면의 영감이라고 부추긴다. 결국 신학생들은 자신을 지나치게 크게 여기게 되고,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윗사람들의 끊임없는 관심을 요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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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뜻하신 사랑은 필리아가 아닌 '아가페'였다. 베드로는 한참 후에야 그 차이를 깨달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만이 베드로의 소명을 이룰 수 있게 한다는 의미였다. 그 소명은 더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지 않고 남들이 그 팔을 벌리고 띠 띠워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요21:18). 베드로는 늙어서야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149p
중증 환자가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자리에 같이 있어 본 일이 있다면 정신과 의사가 던지는 질문에 놀랐을 것이다. 의사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어디가 불편하십니까?"하고 묻지 않고 간혹 이렇게 묻는다. "지금이 몇 시인지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오늘은 무슨 요일인지 아세요? 지금은 몇 월입니까? 올해는 몇 년도 입니까? 질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지금 여기는 어느 나라, 어느 지방 입니까?" 끝으로 의사는 이렇게 묻는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친한 친구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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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 일과 쉼, 의무와 취미의 구분이 흐려질 때 삶은 리듬과 방향을 잃는다. 이런 '건강치 못한 삶'은 사람을 시간의 주인이 아닌 피해자가 되게 함으로써 결국엔 영성과 창의력을 말살시킬 수 있다.
162p
만인을 사랑하라고 배운 사람이 실상은 친구가 하나도 없고, 집중적인 기도 훈련을 받은 사람이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역설이다. 아무에게나 속을 내보이기 때문에 따로 가까운 이들에게만 보여 줄 부분이 없다. 내밀한 프라이버시의 담이 허물어져 혼자만의 공간도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을 너무 많이 내준 사역자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자신이 온전한 인간임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176p
사역자가 무신론과 불신을 정통 신앙과 교리의 대립으로만 생각한다면 학생들의 모든 질문은 위협으로 느껴질 것이요, 학생들의 모든 회의는 방어로 맞서야 할 공격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란, 신앙과 불신, 회의와 믿음,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역자 자신의 신앙이 그 좋은 증거이다. 학생들이 이것을 깨우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186p
침묵이란 타인과 대화하는 것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나누는 대화마저 멈추는 시간이다. 자유로이 숨을 들이쉬며 자신의 정체를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192p
이제 스페인어를 배운 외국인은 자만심에 빠져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듣기만 한다면 내가 무엇을 실수하든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그의 스페인어는 영영 외국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사역자도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196p
흔히 사역자들은 자기 행동의 근거가 되는 기본 가정을 따져보지 않은 채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곤 한다. 주변적인 문제를 이용해 정작 중요한 문제를 얼마든지 감출 수 있다. "이 학생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하는 질문으로 "나는 왜 이 학생에게 뭔가를 말해 주려 하는 것일까?" 하는 근본 질문을 감출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학생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나는 왜 많은 학생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일까?" 하는 근본 질문을 가릴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예배를 재미있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근본 질문을 덮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좋은 증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그리스도는 내게 정말 의미 있는 분인가?" 하는 근본 질문을 외면할 수 있다. 끝으로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역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나는 진정 사역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근본 질문을 회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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