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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ul Moment/완독서

(완독) 팀 켈러의 기도

by 뒹굴거리는프로도 2024.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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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 초, 완독)


25p

"불치병에 걸렸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봐요. 의사가 약을 주면서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알씩 먹어야 하고 거르면 몇 시간 안에 숨이 끊어진다고 경고하는 거예요. 절대로 잊으면 안 되고 그랬다가는 반드시 죽을 테니 알아서 하라는 말이지요. 깜박할 수 있을까요? 며칠씩 까먹기도 할까요? 아닐 거예요. 목숨이 달린 일이니 잊을 리가 없죠. 빼먹지도 않을 테고요. 우리 부부가 함께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눈 앞에 닥친 일들을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해요. 무심코 지나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72p

그러기에 16세기에 활동한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모든 인간에게는 "디비니타티스 센숨', 즉 신적인 존재를 알아보는 지각이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심중에는 신성을 감지하는 천부적인 본성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의 마음 밭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77p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 내면서도 욥은 절대로 주님께 등을 돌리거나 그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기도하면서 고난과 고통을 겪어 갈 따름이다.

 

79p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요 1:1-14). 하나님을 그보다 더 알아듣기 쉽고, 인격적이며, 근사하게 소통하는 통로는 없다. 인간의 눈으로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그랬다가는 감당치 못할 만큼 강력한 광채에 금방 시력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해를 바라보려면 필터가 필요하다. 빛을 걸러주는 장치가 있으면 엄청난 불꽃과 빛깔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성경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인간본질의 필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할 수 있다.

 

87p

"...인간의 말은 죄다 응답하는 말이다.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말하는 법이다." 피터슨이 이 글을 쓴 지 얼마 안 돼서부터, 갓난쟁이 시절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까지 어린아이들이 노출되는 단어의 개수와 어휘의 폭에 따라 이해력과 소통 능력이 크게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인간은 들은 만큼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피터슨의 말마따나, "인간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까마득히 앞선다"는 사실을 가슴깊이 새기는 게 기도 훈련에 필수적이다.

 

88p

기도의 목표가 진실하고 인격적인 교제라고 본다면, 온 마음을 다해 성경에 기록된 한 구절 한 구절에 깊이 몰입하는 게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유일한 길이다.

 

89p

기도는 하나님 말씀을 읽는 일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성경과 기도는 한 덩이가 되어 크리스천을 참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준다.

 

97p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면, 끝내는 듣고 싶은 얘기를 해 주는 정체불명의 신, 또는 그럭저럭 이해할 만한 하나님의 어느 한 면모만 좇아 기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도에서 결정적인 한 수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그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데 있다. ...기도하면서 알아 가고 싶은 미지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잘 알려진 하나님께 아뢰는 것 사이에는 또렷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제 입맛대로 신앙적인 성취를 탐닉하지만, 후자는 순종하는 믿음을 행동에 옮긴다. 즐거움으로 치자면 전자가 한결 낫지만 중요하기는 후자가 훨씬 윗길이다. 기도의 핵심은 자기 표현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답하는 법을 체득하는 데 있다. 

 

98p

휫필드는 자신의 느낌을 하나님이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해석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을 위해 쓰라린 기도문 한 편을 짓는다. "하나님께서 이 무지한 아비어미를 더 신중하고, 더 침착하며, 사탄의 술책을 더 잘 꿰뚫어 보게 하셔서 주님의 소유인 교회를 섬기는 데 더 요긴한 일꾼이 되게 해 주세요."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충동을 이끌어서 슬기롭게 행동하는 길을 선택하게 만드시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성경을 읽지 않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걸 확인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128p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사랑해야 할 것들이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 가장 큰 사랑을 드리는 게 마땅하지만 주님을 막연히 의식하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는 그분의 은혜와 임재를 지상에서 누리는 번영과 성공, 지위, 애정, 또는 쾌락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이러한 심적인 고장을 인식하고 그게 얼마나 삶을 뒤틀어 놓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한, 기도는 치유의 통로가 아니라 문제의 일부가 될 따름이다.

 

143p

루터의 논문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깊이 묵상하며 연구한 성경 본문을 토대로 삼으며 주님께 드리는 기도로 그 말씀에 화답하라는 것이다. 아울러 성령님이 '설교하기' 시작하시는지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이때다 싶으면 통상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153p

이해를 도와줄 예화가 있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그렇다면 스위치가 전구에 에너지를 공급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빛은 전기에서 나왔다. 스위치는 에너지 자체가 아니라 전구를 동력원과 연결시켜 주는 장치일 뿐이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163p

"나라가 임하시오며" 어거스틴은 한사코 눈을 뜨지 않으려는 이에게는 사방이 암흑 천지인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그분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인간 고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창조주를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두고 섬기면 영적, 심리적, 문화적, 심지어 물질적인 문제들이 줄을 잇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 칼뱅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정욕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각들을 빚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는 '주권'과 관련한 간구다.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 이는 토머스 크랜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게 하시고, 명령하신 것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려 주셔서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길 구하는 것이다.  루터는 여기에 외면적이고 미래적인 관점을 덧댔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이지만,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온갖 고통과 상처, 가난과 죽음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미래의 삶을 갈망하는" 간구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164p 

주님은 스스로의 욕구를 좇는 대신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다. 예수님은 그가 해 주신 일보다 더 힘든 일을 하라고 물어보시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말이다. 어거스틴의 뒤를 이은 루터는 이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앉아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에게 복수하려 들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인신공격과 중상모략, 뒤에서 몰래 하는 험담 ... 다른 이들에게 퍼붓는 저주 따위를" 피할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 인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조작하며,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일을 몰아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삶을 통제하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어서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기에 칼뱅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건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172p

C.S.루이스는 개인을 알기 위해서는 다수가 모여 이룬 공동체를 통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스로의 교우 관계를 되짚어 보면, 한 친구가 가진 인성의 일부 면모는 다른 벗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두 번째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잘 알 수 있었을 첫 번째 친구의 일면을 놓쳐 버린다. "혼자 힘으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의 전모를 드러내려면 나 외에 또 다른 빛들이 필요하다." 평범한 한 인간을 알아 가는 데도 공동체가 필요하다면, 수많은 이웃들은 물론 예수님을 알아 가는 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동료들과 더불어 기도하면, 예전엔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다양한 풍모를 보고 들을 수 있다.

 

178p

포사이스는 이렇게 적었다. "'지금은 성령 충만하지 않아서 기도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기도하라." 기도에도 누적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기도는 언제나 고된 노동이며 종종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더러 기도하기 위해 한바탕 씨름을 벌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날그날 하나님과 더불어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할 순간이 오면, 마치 작당이라도 한 듯, 온갖 것들이 길을 막아서기 일쑤다." 일단 기도를 시작한 뒤에도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 진땀을 쏟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생각은 하나님과 아직 처리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갖가지 부담스러운 일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메고 돌아다닌다." 하나님은 평안하고 평온한 시간을 허락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시지만, 참고 씨름하며 기도하는 수준을 벗어났노라고 장담할 수 있는 크리스천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207p

둘째로, 묵상은 속사람 또는 성품의 변화를 약속한다. 쭉정이는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나무에는 과실이 열린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나무는 성장하지만 쭉정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묵상하는 크리스천은 일의 앞뒤를 골똘히 생각하여 깊은 확신에 이르는 성품을 갖는다. 어려운 개념을 쉽고 간단한 말로 설명할 줄 알며, 무슨 일을 하든 이면에는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묵상할 줄 모른다. 만사를 건성으로 살피며,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고르고 선택하며 살 뿐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움직인다. 기분을 좇아 행동하다 보니 피상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묵상하는 이들은 압력을 받아 내고 견딜 줄 알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쭉정이처럼 남들이 몰려가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 뿐이다.

 

208p

묵상은 열매를 맺는다. 성경이 말하는 열매란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온유, 절제 같은 성격적인 특성으로 (갈 5:22), 하나님 곁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삶 전체를 바꿔 놓는다. 

 

237p

이것이 많은 크리스천들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늘 아버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거룩한 생명, 곧 성령님을 중심에 품고 산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용납과 사랑을 받고 있다.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저 단단히 부여잡지 못하고 죄다 까먹고 만다. 여전히 나쁜 습관에 시달리고, 걱정, 따분함, 낙담, 분노 등에 휩쓸리기 일쑤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맞서고 처리해야 할 크고 작은 문제와 이슈들이 산더미 같다. 하지만 그 바닥에 깔린 근원적인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부요해졌으면서도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다.

 

265p 

그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인간이 무언가를 찬양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살폈다. 예를 들어 그림을 보거나, 노래를 듣거나, 책을 읽고 "멋지다!"고 할 때, 거기엔 무슨 뜻이 들어 있는 걸까? 그러한 대상들을 존중하고 칭송하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하며 그렇지 않으면 멋지고 근사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놓치게 된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그제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에 담긴 의미가 차츰 확연해졌다. 하나님이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보다 훨씬 더 감탄과 칭찬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면, 주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는 "그저 깨어 있다는, 현실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할 따름이다.

 

266p

본래 인간은 즐거워하는 대상에 찬사를 보내는 걸 좋아한다. 찬송은 기쁨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완성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연인들이 서로에게 예쁘고 멋지다는 얘길 끝도 없이 계속하는 건 의례적인 인사치례가 아니다. 기쁨은 표현으로 완성된다.

 

268p

견딜 수 없을 만큼 악조건 아래서가 아니라면, 대체로 찬양은 내면의 건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드러내는 지표가 되는 듯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이란 너나없이 행복을 추구하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법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바로 그 집착을 사랑으로 인식하고 경험한다. 하지만 인간이 떠안은 가장 큰 문제는 죄의 영향을 받아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요인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얘기한 바 있지만, 그 결과 사랑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향하게 되었다. 사랑이 질서를 잃고 '탈'이 난 셈이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걸 사랑하거나 사랑해야 할 걸 사랑하지 못하거나 덜 사랑해야 할 걸 더 사랑하든지, 더 사랑해야 할 걸 덜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다. 

 

270p

이는 무슨 뜻일까? 스미스는 책 한 권을 통째로 바쳐서 인간이 더없이 철저하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섬기는 대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명제를 설명하고 증명한다. 생각과 주장, 신념은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도구들이다. 하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가 찬양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무엇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며 기꺼이 찬양하고 또 남들에게도 찬송하길 요구하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 준다. 지나친 분노와 걱정, 낙심은 대상을 잘못 잡은 사랑의 결과이며 사회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

 

274p

루이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어떤 하나님이 이를 지으시고 내게 주셨을까?"를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면서, 항상 그럴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훈련은 일상생활 가운데 더 풍성한 기쁨을 찾고 밀도 높은 기도 시간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단언한다. 아울러 "가장 낮아졌을 때 경배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면 지극히 높아진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는 몹시 어렵다"고 조언한다.

 

287p

예수님이 언약의 조건을 백퍼센트 충족시켜 주신 까닭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수혜자가 되었다.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의로움을 보이시는 동시에 죄인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셔서 의롭게 여겨 주실 수 있게 된 것이다.

 

331p

그러므로 이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담대하고 구체적이며 열심히, 정직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소원을 아뢰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지혜로운 사랑을 인정하고 끈질기게 순종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덕분이며, 그러기에 무엇이든 그분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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